성 인 경
1. 당신의 영적 분별력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최근에 다음과 같은 상담 전화를 받았습니다.
청년 A: “간사님, 예수를 안 믿는 남자이지만 저를 무지 좋아한다고 하는데 결혼해서 전도하면 되겠죠?”
청년 B: “간사님, 힘들게 들어간 회사인데 부조리한 게 너무 많아서 사퇴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청년 C: “간사님, 우리 교회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표절하시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청년 D: “간사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뽑힌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청년 E: “간사님, 촛불 집회에 우리 교회 청년들을 다 데리고 나가도 되겠죠?”
여러분이라면 이런 질문들에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만약 질문한 분들이 청소년들이었다면 제 소견을 곧바로 말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예수 믿은 지 한참 된 청년들이고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청년들이라, 쿨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기초로 혼자서 좀 생각해 보시고 스스로 결정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나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난 후에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질문의 내용이나 수준과는 상관없이 라브리의 모토와 같이 모두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찾고 있는 분들이었는데,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가슴이 아팠던 이유는 어떤 질문은 오래 예수 믿은 저라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는데도 같이 기도하며 씨름해 보지 않고 혼자 끙끙대도록 내팽개친 것 같아서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모두 자기가 닥친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답을 찾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모두 영적 분별력의 문제였습니다. 그 말은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말이었고, “무기보다 강한 지혜”를 찾고 있다는 말이었고,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기독교세계관적인 대안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2. 영적 분별력이 모자라거나 덜 자랐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1) 아마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요즘 세상에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본받아 “느낌이 오는 대로”, “마음 가는대로” 사는 습관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적 원인입니다.
(2) 아마 어떤 사람은 꿈이나 하나님의 음성, 환상 혹은 직통계시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기도해 보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성경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영성 탓입니다.
(3) 아마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나 영적 지도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해 주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습관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육적 환경 탓입니다.
(4) 아마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매우 인간적인 잔꾀.’라고 매도를 당해 왔거나 비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쇠뇌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적 오해 탓입니다.
(5) 아마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거나 기독교세계관 공부를 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어떻게 하면 영적 분별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1) 가장 안전한 방법은 공동체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영적 아비 혹은 멘토”로부터 졸졸 따라 다니며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멘토 기피증’을 극복해야 합니다. “과연 나같이 골치 아프고 복잡한 사람을 도와 줄 멘토가 있겠어요?”라는 비관적인 태도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 나의 멘토가 되면 되는데 멘토를 둘 필요가 있을까요?”라는 교만한 태도를 이겨야 합니다. 만약 염소처럼 똑똑 하여 길을 잃거나 헤매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목자가 필요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처럼 길도 잘 잃어버리고 삶의 순간순간에 지혜가 필요한 사람은 스승과 멘토가 필요합니다.
(2) 말랑말랑한 친구만 아니라 날카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고 할지라도, 오랫동안 갈지 않거나 무리하게 쓰면 무디어지거나 녹이 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칼을 날카롭게 갈 수 있을까요? 솔로몬은 “철은 철과 부딪쳐야 날카로워진다.”(잠언 27:17)고 했습니다. (As iron sharpens iron, so one man sharpens another, NIV) 칼이 늘 날카로우려면 날선 칼을 만나야 하듯이, 날카로운 친구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말랑말랑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친구만 아니라 때로는 날카롭고 까다로운 친구를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대 최고의 기독교 저술가이며 변증가인 루이스(C. S. Lewis)를 다듬어 준 사람들은 ‘잉클링즈(Inklings)’의 톨킨과 그 친구들이었다는 것을 들어보셨지요?
(3) 좋은 독서 모임이나 토론회에 참석하는 것도 좋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강릉에 사는 목사, 치과의사, 변호사, 서점주인 등과 정기적으로 독서 모임을 가진 적도 있고, 양양 주변에 사는 목사, 사모들과 성경 공부를 하기도 했고, 강릉, 속초, 양양 지역에 있는 청년 지도자들과 매주 한 번 모여 책 읽고 글 쓰는 모임도 해 보았고, 작년에는 다산 정약용을 본받아 ‘겨울 산중 강학회(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읽기)’를 연 적도 있습니다. 현재는 라브리 간사님들과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간사 아카데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독서 모임이나 토론회에 다녀올 때마다, “오늘도 한 수를 배웠구나.”라는 생각과 “아직도 배울 것이 많구나.”라는 생각에 그 다음 한 주간이 매우 기다려지곤 합니다.
(4) 성경을 세계관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경은 신앙적, 철학적, 도덕적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진리이므로 하나님의 눈을 배우고 영적 분별력을 키우기에 가장 좋은 책입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청년들에게 종종 말하기를,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라브리까지 오셨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은 이 성경 속에 다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1) 성경 진리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원리를 찾고,
2) 그것이 당시의 문화적 시대적 풍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연구하고,
3)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이슈들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성경을 기초로 현대적인 이슈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으면 더 좋을 수 없습니다.
(5) 고생을 통해 지혜를 배우는 것도 좋습니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막스플랑크교육연구소’가 15년 동안 1000명을 대상으로 고생하는 것과 지혜를 배우는 것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를 진행 한 후에, “독일 사람들 중에 고생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흥미 있는 리포트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고 합니다.
1) 지혜로운 사람은 역경을 극복했거나 고난을 체험한 경험이 있다.
2) 지혜로운 사람은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이 있다.
3) 지혜로운 사람은 일찍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체험한 경험이 있다.
4) 지혜로운 사람은 고생을 통해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 경험이 있다.
사실 우리나라 어른들은 그런 연구를 진행하지 않고도 “젊을 때는 고생을 사서라도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생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고생을 통해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생만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고생과 실패는 잔인하지만 분별력과 지혜를 배우는 첩경입니다.
4.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가 가득한 하나님의 지혜의 방으로 청년들을 초대합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혹은 시대가 혼탁할수록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결혼이나 직장이나 승진이 아닙니다. 시대를 통찰하고 이길 수 있는 영적 분별력입니다. 그 영적 분별력은, 솔로몬의 표현을 빌리면, 지혜이며, 명철(明哲)이며, 지식이며, 보배이며, 전략(戰略)이며, 지략(智略)입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 24:3-6)
기독교세계관학교는 영적 아비들과 선배들과 동료들로부터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가 가득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집입니다.